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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따로 또 같이]/장끼님 방

익산 유적지 문화답사(2024, 5, 2)

by 장끼와 까투리 2024. 5. 7.

 

재경청주중고동기회에서 주관하는 상반기 문화답사 행사로

익산지역을 선정했다.

서울과 청주에서 각각 40명씩 버스 2대로 출발하며

익산에서 상봉하며 인사를 나눈다.

 

백제 도읍지인 공주와 부여는 전에 여러 번 탐방을 하였지만

익산은 이번이 처음이며 관심이 크다.

공주, 부여와 함께 익산 왕궁은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가고 싶었기에  이번 익산 답사가 반갑기만 하다.

 

연못 건너편으로 석탑과 용화산이 보인다.

 연못가에는 벤치도 있어 풍경을 즐기면서 힐링을 할 수 있다.

 

 

문화해설사가 유적에 관하여 상세한 설명을 한다.

 

청주팀 단체사진^^

 

  왼쪽에는 미륵사지석탑이,  오른쪽에는 미륵사지 9층 동탑이 보인다.

이 두탑 사이에는 원래 목탑이 있었으며

화재로 소실되어 터만 남아있지만 박물관에서 복원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오월 초입인데 벌써 햇살이 따갑다.

좀 더 지나면 그늘이 없어 무더운 더위로 이동이 힘들 것 같다.

 

탑 앞에 세워진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창건 당시가 아닌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졌다고 한다.

주로 사찰 입구에 세워둠으로써 그곳이 신성한 공간임을 알리는 목적이었다고 하며,

현재는 당간이 사라지고 지주만 남아있다.

 

뒤편에 보이는 동원 구 층 석탑(東塔)은 미륵사지 석탑인 서탑(西塔)과

같은 형태라고 고증하고 복원한 것이다.

똑같은 모습이었다는 기록이 없었기에 졸속으로

복원했다는 비판이 많았다고 한다.

 

▲ 익산 미륵사지 석탑

 

 국내에 현존하는 최고. 최대 석탑으로서 높이는 14.24m이고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2015년 백제 왕궁터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문화재정은 석탑을 완전히 해체한 뒤 다시 쌓아 올리기로 결정하고 2001년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으며 2019년 4월 30일 총 18년에 걸친 복원이 완료되어 완전히 공개되었다.

 

백제의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왕이 된 마동 즉, 무왕(백제 30대 왕 600~641)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이를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삼존을 위하여 전(금당), 탑, 낭무(화랑)를 세웠다고 한다. 이와 달리 미륵사의 창건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신앙만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해 마한 세력의 중심이었던 이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웠을 거라는 추측이다. 백제의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보내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도로 발휘됐을 것으로 짐작할 뿐만 아니라, 신라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도와주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삼국의 기술이 집결되었을 것이다.

 

원래는 9층이었지만 반파되어

현재는 6층까지만 남아있는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고 하며,

반파에 대해서는 벼락으로 지반이 침하, 도굴등

여러 가설이 존재하는데 정확한 물증은 없다고 한다.

 

예전의 교과서에서 보이던 탑은 콘크리트를 바른 괴상한 모습이었는데

해체 복원 공사를 해서 지금 모습이 되었다.

 오랜 세월을 지나 훼손되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훼손된 부분을 

 콘크리트로 보수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 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사리병과 금제사리봉영기, 구슬등

사리장엄구 9900여 점이 나왔다고 한다.

금제사리봉영기의 기록에 따라 미륵사가 백제 무왕 재위

기해년(639)에 창건됐음이 증명됐다.

 

이 기록에서 기존의 서동(무왕)과 선화공주 이야기는 거짓일 가능성이 많아졌으며

실제로 이 미륵사는 무왕의 황후인 사택 씨가 세웠다고 한다.

황후인 사택 씨는 재력과 위세를 가진 백제의 유력 귀족 가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국립익산박물관 주변 풍경^^

 

뒤편에 보이는 탑이 서탑과 동탑 사이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목탑의 복원상이다.

 

건물 지붕 끝에 장식하는 치미.

 

무왕의 초상화 앞에서^^

문화해설사가 백제 무왕 시대의 역사를 해설하고 있다.

 

복원된 미륵사의 조감도^^.

 

기와에  '首府' 글자가 새겨진 도장이 찍혀 있다.

부여에서도 발견되었으며 백제의 왕궁이나 관청에서 사용했던 기와로 여긴다.

 

와적기단.

 

미륵사지석탑에서 나온 사리 장엄구.

    

  왕궁터에서 발굴된 유물. 

 

  돌방 내부에 안치된 나무 널.

 무왕의 목관으로 추정되며 당시에 나무널이 대부분  부패되었지만

복원한 후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이 곳에 전시된 나무널은 모조품이다.

왼쪽에는  봉분 속의 돌방 /  오른쪽은 나무널 장식 금속공예품(투금구,좌금구,널못)

 

 

동원 금당터^^

금당은 불상을 모신 법당으로 사찰의 중심 건물이다.

이곳은 동원으로 금당이 있던 곳이며 기단부 석재가 가장 많이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서울, 청주 단체사진^^

 

 

익산 왕궁리 유적(益山 王宮里 遺蹟)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사적 제408호 이다.

왕궁리유적은 백제 말기 사비(부여)와 함께 복도로 이해하고 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백제 말기 왕궁으로 일정기간 시용된 후 왕궁의 중요 건물을 철거하고

탑과 금당, 강당 등 사찰이 들어선 복합유적이다.

 

한편 익산의 석왕동에는 대왕릉과 소왕릉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 쌍릉으로 불리며

백제 무왕과 왕후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왕궁리 오층석탑^^

 

통일신라초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약 8.5m이며

1997년에 국보 제 289호로 지정되었다.

1965년에 보수해 1단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린 석조 불탑이다.

이때 발견된 장업구는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보석박물관^^

백제 왕궁터에서 1,400여 년 전의 보석 가공터가 출토되면서

신비로운 보석의 도시로 알려져 왔다.

우리나라 유일의 보석테마단지가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백제 유적을 탐방하고 당시의 문화를 고찰하는 값진 역사 학습이었으며,

 세월의 무상함과 백제인의 숨결을 느껴보는 시간 여행이었다.

 

한편 학창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 담소하며 격의 없는 정겨운 시간을 보냈으며

종종 건강이 안 좋은 친구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안타깝다.

친구들 간에 오가는 대화의 대부분은  건강이 주된 주제이다.

 

요즘 친구를 보면 처음 만날 때나 헤어질 때나 정해진 인삿말이 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건강하지?          건강이 최고다.  건강해라~~~ "

 

 

모두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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