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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따로 또 같이]/장끼님 방

그리운 어머니

by 장끼와 까투리 2012. 5. 4.

                                                 

                                                  

                               

지난 가을 느즈막  억새 풍경으로 유명한 천관산 산행을 마친 후 버스에 올랐다.

자리에 기대니 하루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며 저절로 눈이 감긴다.

마침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을 노래하는 음악 소리에 십여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모습이 떠 오른다.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는 모습을 누구에게 보일까 봐 고개를 숙였다.

살며시 고개를 들어 옆 산우의 얼굴을 살펴보니 눈을 감은 채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고 있다.

우리는 왜 한결같이 어머니 말만 들어도 한없이 따뜻해지며 정겹고 절절해지는 것일까?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힘든 삶의 과정은 유교 사상의 가부장 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 그 당시 가난한 시절에 시집와 까다로운 시부모 모시고 시동생, 시누이를 보살피며 잡다한 집안일 등

혹독한 시집살이와 더불어 고된 농사 일까지....

더욱이 칠거지악이라 하여 후사가 없으면 죄인이 되어야 하고

가장의 그릇된 행실에도 순종하며 이 모든 것이 숙명이라고 받아들인 현실의 세계는

가혹함을 넘어 잔인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묵묵히 참아내며 자기 한 몸 아끼지 않고 자식들에겐 한없이

사랑을 베푸는 모정은 더 없이 아름답고 존경스럽다.

 

 

아버지와 같은 시골 초등학교 후배인 어머니는 열여덟 살 나이에 시집을 와서 성격이 괴팍하신 홀시어머니

그리고 유복자인 시동생과 함께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어머니 역시 그 당시의 여느 집 며느리와 마찬가지로 시집살이의 과정을 겪으셨지만 착하기만 한 어머니는

홀시어머니의 성격을 감안하면 고통의 강도는 더욱 가중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 또한 계모 밑에서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내며 쫓겨나듯 열여섯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 아버지가

세살도 되기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어 청상과부가 되셨다고 한다.

이후 홀몸으로 서울에 상경하여 온갖 고생을 다하며 아들 교육과 뒷바라지를 하신 할머니 !

       그러하신 할머니의 아들에 대한 애착은 충분히 상상이 될 뿐더러  한편으로는

       귀중한 아들을 빼앗기는 심정이었으리라 ~

생각하면 할머니의 인생도 한없이 가련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전쟁은 약관의 나이에 제약회사를 운영하여 이룩한 사업 성과와 전 재산을 거의 잿더미로 만들었다.

다시 시작한 사업도 전과 같지 않아 선배의 권유로 청주에 내려와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시니 이 후

우리 가족은 칠 남매까지 합하여 모두 열명으로 늘어났다.

아버지는 공무원 월급만으로는 늘어나는 생활비와 교육비를 감당하기 힘들어 자본도 없이 사업을 시작해

관급과 소매를 병행하였으나 자금 부족으로 어려워졌고 빚은 계속 늘어나 점차 늪으로 빠져버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는 사업의욕을 상실해갔고 허구한 날 술로써 주야를 보냈으며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포기한, 무기력하고 한심한 남자로 변해갔다.

 

 

 한편 집안 일과 약국(집과 연결) 양쪽 일을 보면서 어머니의 손은 항상 젖어 있었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으며 더욱이 빚쟁이의 독촉은 굴욕적이고 두려웠다.

점점 더 쪼들리는 생활비와 자식들의 학비에 대한 아우성으로 어머니의 작은 체구는 점차 왜소해져갔다.

아버지에 대한 자식들의 원성은 높아만 갔지만 오히려 나무라며 아버지를 감싸고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어머니가 야속하기만 할 따름이다.

 

 

집안의 장남으로서 어려운 시기에 어머니의 고생을 함께 나누려고 학업 시간도 줄여가며 나름대로 틈틈히 도왔다.

직장 생활 초기에는 내 앞 생각 안 가리며 경제적인 도움도 드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미흡하고 죄송스러운 마음 그지없다.

또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은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식들이 성장해 결혼 후에도

자식의 어려움과 고통은 여전히 어머니 가슴에 한숨과 절망만 안길 뿐이다.

 

 

고인이 되신지 십년이 훌쩍 넘었지만 당시 상황은 아직도 머릿속에 또렷하며 영상처럼 나타난다.

영원히 옆에 계실 것만 같았던 어머니는 동네 목욕탕에서 갑자기 혼절하시어 급히 병원으로 모셨으나

회복을 바라는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하늘나라로 가셨다.

언제나 나에게 어머니의 자리는 크고 절대적이었으며 장남으로서 어머니의 아픔과 고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아왔기에  더욱 애통하고 한없이 슬픔 속으로 빠져버렸다. 

 

 

이제는 언제든지  뵐 수 있었던  어머니의 모습도 , 목소리도 영영 들을 수가 없구나 !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 !     아무리  불러도  소리없는  메아리만  내 가슴을  때리네 !

인생이란  원래 이렇게  허망한 것인가 ?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밀려오는 허무함이 공허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간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지인들로부터 어머니가 아버지 술 때문에 착한 분이 고생 많이 하셨다는 말을

종종 들을 때면 울컥한  마음과  함께 가슴이 아프다. 

가끔  꿈속에서 어머니를 뵈면 생전의 모습이 그려져 한층 더 보고 싶어진다.

금년 제삿날 산소에는 어떤 꽃을 선물할까?   어머니는 특히 빨간 장미꽃을 좋아 하셨다.

또 어머니의 온화한 모습을 보노라면 우아하고 탐스러운 국화꽃이 연상되곤 한다.

아무래도 꿈속에서 만나 뵈면 여쭈어봐야겠다.   잠시 눈을 감고 어머니 생각에 잠겨본다.

 

 

 보름달을 보면 생각난다.   화안하고 푸근한 어머니의 얼굴이...

 

 국화꽃을 보면 생각난다.   고결하고 우아한 어머니의 마음이...

 

 할미꽃을 보면 생각난다.   허리굽고 수줍은 어머니의 모습이...

 

 어머니를 보면 생각난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사랑의 손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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