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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지/경기.충청

각호산, 민주지산(2012. 02. 11)---산내음 시산제

by 장끼와 까투리 2012. 2. 15.

 

 

 

 

한참 전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은 책이지만 무슨 미련인지 아직도 책꽂이에 꽂지 못하고

책상 위에 놓아둔 채 아무데나 펼쳐지는 대로 한 페이지씩 읽어보는 책이 있다.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의 작가 김훈의 장편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이다.

 

내가 사계절 산길을 걸으며 보고 느꼈던 숲과 그 숲속의 나무와

사람 사는 모습을 견주며 감명 깊게 읽은 책이다.

민통선 안에 있는 수목원에서 세밀화 그리는 일을 하는 계약직 공무원 <조 연주>,

그녀가 화자가 되어 2월말부터 계약이 끝나는 겨울까지 일어나는 일상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가 김훈은 그 일상을 그다운 필체로 묵직하고 깊이 있게 담아냈다.

그녀의 젊은 날의 숲은 생명이 움트는 이른 봄부터 생명을 간직하는 겨울까지를 망라한다.

흐흐흐... 독후감을 쓰려는 것이 아니니...

 

깊게 사유할 문장들이 많지만 산행기를 쓰기 위해 인용하는 책이니 산과 숲에 관한

몇 문장을 원문 그대로 옮겨 적어본다.

 

*나무들은 서로 적당한 간격으로 떨어져서 저마다의 존재를 남에게 기대지 않으면서도

숲이라는 군집체를 이루고 있다.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에 대하여 왜 그런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타당한가.

*여름의 숲은 크고 깊게 숨 쉬었다.

나무들의 들숨은 땅속의 먼 뿌리 끝까지 닿았고

날숨은 온 산맥에서 출렁거렸다.

뜨거운 습기에 흔들려서 산맥의 사면은 살아 있는 짐승의 옆구리처럼 오르내렸고

나무들의 숨이 산의 숨에 포개졌다.

*살아가는 일처럼 나무는 죽는다.

죽음은 가벼움도 무거움도 아니고 무거움의 절정과 가벼움의 절정이 합쳐지면서

그 양쪽을 오가는 시간의 흐름이다.

 

 

 

 

 

 

2월 11일(음력 정월 스무날). 일상 우리가 하는 산행일과는 달리 큰 의미를 갖는 날이다.

우리는 음력 정월이면 그 동안의 안전 산행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앞으로 일 년 동안의

안전 산행을 기원하는 바람을 담아 시산제를 올려왔다.

올해는 민주지산 오르기 전 도마령에서 시산제를 올린단다.

시산제 날이어서 그런가 만차다!~~~

지난 주 한라산 백록담까지 올라갔다 오느라고 용을 썼더니 온몸이 아우성이다. 흐흐흐.

같이 가기로 했던 짝꿍은 만수무강을 위해 쉰단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애면글면, 비실비실, 반 토막 산행이어도 지금까지 무탈했으니 고마웁고,

앞으로도 안전하게 산행하려면 산신령님께 머리 조아려 기원해야하니 가야지!!!

 

영동군 상촌면 고자리와 용화면 조동리를 잇는 도마령은

칼 든 장수가 말을 타고 넘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데...

훗!~ 우리는 멋재일이의 애마를 타고 산지팡이를 들고 올랐네.

에구... 바람이 어찌나 맵던지...

오돌오돌 떨면서도 우리들은 엄숙하게 정중하게 시산제를 올렸다.

시산제를 위해 예쁜 현수막 만들어서 보내주신 프로님의 고마운 마음을 담아

단체사진도 찍었다.

시루떡 한 조각과 막걸리 한 잔씩을 들고, 완전무장을 하고 산길을 오른다.

시산제 지내느라 지체되어 몸이 얼어서 그런지 손도 시리고 발도 시리고...ㅠ

오르막은 왜 이리 가파른지... 비껴갈 수도 없이 좁게 난 눈길에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폐가 될까봐 맘대로 쉴 수도 없고...

 

 

 

 

 

 

 

 

 

 

 

그러나 모든 일이 한 고비가 있듯이 꾹! 참고 넘기니 갑자기 바람이 잦아들면서

겉옷을 벗어야 할 정도로 날씨가 따스하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높고 푸르고. 그야말로 창공이며, 만공이며, 흐흐 성공이다!

각호산 정상석까지 오르는 돌벽이 만만치 않지만, 금초님한테 창피를 무릅쓰고

엉덩이를 밀어도 되니 도와달라고 부탁해서 무사히 인증사진을 남겼다.

에구... 내려오는 돌벽이 더 무섭네...

산우리는 날래게 어느새 내려갔는데 나는 어쩌지? 은초야 너는 어쩔래?

금초님과 무적님과 소리꾼님이 있어서 이 또한 무사히 내려왔다. 고마워욤~~~

 

눈이 한길이나 쌓인 산꼭대기지만 정말 따사롭다.

이미 도착해 식사를 하는 중간팀 근처에 푸석한 눈을 발로 다지고 점심상을 편다.

은초와 산우리가 새로 장만했다는 버너가 작지만 화력은 정말 끝내준다.

금방 라면이 끓여진다. 난 빵을 가져갔는데 덕분에 뜨끈한 라면 국물에 밥까지

말아서 맛나게 먹었다. 크다고 좋은 건 아닌가보다. 크크크...

 

산도 더운지 땀을 줄줄 흘린다. 마치 한여름 큰 비가 오는 날처럼.

아직은 땅 속이 얼어서 겉으로만 흐리니 질척하지는 않았다.

대피소 근처 비탈진 미답의 눈밭에서 영화처럼 사진도 찍고, 러브스토리 흉내도...

다 오른 것 같은데 민주지산 정상까지 또 오르막이다. 에구... 나 죽어~~~

눈길이 다져지질 않아 푹푹 빠지니 더 힘이 든다.

다행인 것은 엎어져도 코는 안 깨지겠다.

소리꾼님 말대로 민주로 가는 길은 이다지도 험난한 것인가!~~~

 

 

 

 

 

 

 

 

 

 

 

와우!~~~

탄성이 절로 나온다.

바글바글!!! 민주지산에 산꾼들이 왜 꼬여드는지 알겠네!~~~

저 멀리 덕유산 슬로프도 선명하게 보이고, 황학산도 보이고,

굽이굽이 산줄기가 그야말로 장쾌하게 흐른다.

겨울에 산을 오르는 묘미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몸 안 구석구석이 깨끗해지고 맑아지는 이 기분. 새처럼 날아오를 듯한 이 느낌.

시산제 잘 모셨다고 산신령처럼 훨훨 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려나? 큭! 깨몽!~

 

한 여름 숲의 숨은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온 산맥을 출렁이며

산의 숨과 포개져 짐승의 옆구리처럼 오르내렸다는 데,

지금은 숲은 산의 숨에 살포시 포개져 휴식을 취하는 것 같다.

아직은 달콤한 휴식을 방해받지 않으려는 듯.

오직 깨어 숨 쉬는 것은 산뿐.

머지않아 산에 눈이 다 녹고, 얼어붙었던 땅속이 녹아 부풀어 오르는 봄이 오면

준비된 것들은 깨어나 살아갈 것이고, 어떤 것들은 살아가는 일처럼 죽어갈 것이고...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엄동설한에 산정에 선 우리들은 겨울 숲의 준비된 나무들이다.

매일 새롭게 깨어나 진지하게 삶을 영위해가는 인간 숲속의 준비된 젊은 나무들이다.

 

이제 하산해야지~~~ 득도했으니... 후후후...

경사진 곳에 털썩 주저앉아 엉덩이로 밀어보지만 미끄러지질 않는다.

비닐 포대나 밥상보라도 있으면 신나게 엉덩이 썰매를 탈 텐데...

하긴... 득도한 후에 체신머리없이 엉덩이 썰매 타는 것도 쬠 거시기하긴 하다.

 

 

 

 

 

 

 

 

 

 

 

나는 눈이 아프도록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풍경의 안쪽에서 말들이 돋아나기를 바랐는데, 풍경은 아무런 기척이 없다.

풍경은 미발생의 말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적막강산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을 거느리고 풍경과 사물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가망 없는 일이었으나 단념할 수도 없었다.

거기서 미수에 그친 한 줄씩의 문장을 얻을 수 있었다.

그걸 버리지 못했다.]

<내 젊은 날의 숲> 소설책 뒤에 쓴 “작가의 말”에서 부분적으로 옮겨 왔습니다.

 

감히 대볼 수도 없는 글이지만 지금 산행기를 마치며 느끼는 내 심정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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