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 다 괜찮다”
요즈음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이다.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 씨와 소설가 공지영 작가와의 인터뷰집이다.
이 책 초반에 어떤 신부님이 한 말을 공지영 작가가 인용한 글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세상에 똑같은 나뭇잎도 없고, 똑같은 눈송이도 없고, 모든 것이 다 원본이다.”
남들 눈에는 하나는 삐뚤어져 보이고, 하나는 벌레 먹어 보여도 그게 다 원본이고,
완벽한 세상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라는...
철쭉꽃이 피었든 안 피었든 그대로 원본이다.
만개한 꽃이 꽃의 원본이라고 누가 그러든?
괜찮아, 다 괜찮아.
산행거리가 길 것 같아 A, B 두 팀으로 나누어,
남편과 나는 누룩덤으로 올라 황매평전, 모산재를 지나 영암사로 하산하는 B팀.
어제 저녁 딸내미가 왔다가 늦게 가는 바람에 잠을 제대로 못 잤고,
길도 꼬불꼬불. 차멀미가 심했다.
차에서 내렸는데도 어질어질. 하늘이 노랗다.
누룩덤까지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기억도 안 나네...
아주 오랜만에 산행을 하는 연수는 걱정이 됐는데 예상외로 잘 따라 올라간다.
당연하지... 년식이 있는데...ㅎㅎㅎ
황매산은 그저 철쭉꽃이나 보러가는 육산인 줄 알았는데, 초반부터 암릉이 참 좋다.
2007년 비슬산에 따라 갔다가 빈혈로 쓰러져 나도 고생했지만,
당시 회장을 맡았던 인자무적과 같이 간 남편을 힘들게 했기에
그 후로 꽃 산행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꽃 산행 날짜가 시댁 제사와 겹치기도 했지만 못 가도 별로 서운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올 해는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 있는 제사가 산행일보다 늦고 토요일이 아니네.
어쩐지... 꽃이 하나도 안 폈더라...
그늘을 찾아 소나무 아래서 점심을 먹고, 아름다운 암릉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시원한 바람도 맞고, 멀리 산 아래 경치도 감상하고...
산에 오르면 항상 내가 건강함에 감사한다.
살아 있는 이 순간이 소중하고, 함께 하는 이들이 사랑스럽다.
이 모든 느낌을 수용하는 내 감성과 이성이 참 예쁘다. 그래. 정말 예쁘다.
▲ 누룩덤 전경 !
밥을 먹고 나니 배낭은 가벼운데, 몸이 무겁네.
오르막은 정말 싫다. 그런데 어쩌랴~
저 곳을 올라야 멀리 볼 수 있다는데...
내려다보기 위해 오르는 것이 아니고 멀리 넓게 보기 위해 나는 오른다.
안개가 가득 찬. 육신의 눈으로 멀리 볼 수 없는 날은 더 좋지.
최대한으로 영혼의 감각을 곤두세워 더 멀리 더 널리 볼 수 있으니까.
금방 물로 닦아 말려 놓은 듯 깨끗한 화강암 바위.
손에 닿는 뽀송한 느낌도 좋고, 등산화에 착 붙는 느낌도 좋다.
웅기중기 둘러앉아 인자무적의 하모니카 연주를 들으며 각자 배낭을 털어내고
팬더의 <바다>나, 도올의 <돌이 되어>, <산노을> 노래 들으며 느긋하게 이 아름다운
바위 능선을 감상한다면 금상첨화일 텐데...
아무도 없네...
▲ 손가락 바위 !
▲ 남 성기를 닮은 숫바위 !
▲ 여자 엉덩이를 꼭 닮은 암바위 !
▲ 멧돼지 바위 !
위험구간이 앞에 있는지 지체가 되네.
안 그래도 쉬고 싶은데 잘 됐다.
그러는 사이 부암산과 감암산을 거쳐 온 A팀을 만났다.
A팀 선두인 줄 알았는데 중간이란다.
A팀 후미는 이미 우리가 지나온 누룩덤 방향으로 하산을 했고.
황매평전에 먼저 가서 맞아주려 했는데...
사진 찍느라 천천히 가는 호세님과 산우리랑 함께 가면서 예쁜 야생화도 들여다보고
하늘에 살랑살랑 빗자루질 해놓은 것 같은 하얀 구름도 올려다보고,
정말 한 송이도 피어나지 않은 철쭉꽃봉오리를 아쉬워하면서 할랑할랑 평전을 걸었다.
이 꽃이 필 때는 일시에 어떤 열음(裂音)이 날까?
마치 휘파람을 불려고 입술에 잔뜩 힘주어 주름을 잡아 오므린 것 같다.
아마도 며칠 더 햇빛과 바람이 구슬려야 입을 벌릴 것 같다.
안 폈어도 철쭉이지.
괜찮다, 다 괜찮다.
연수가 등산화를 죄어 신지 않아 발이 삐끗했는지 힘들어 하네.
그럴 만도 하지. 정기적으로 산행을 하는 사람들도 하산 할 때쯤엔 힘들 텐데...
그래도 묵묵하게 잘 따라 내려온다.
너나 나나 참을성과 끈기로도 확실한 자매간이지. 호호호.
영암사지 금당터와 조금 위에 위치한 서금당터에 들러 해박한 산우리의 강의를 듣고,
고즈넉한 폐사지의 분위기에 걸맞을 고급스러운 포즈로 사진도 찍었다.
조금 더 세월이 흘러 장시간의 산행이 힘들어질 나이가 되면 맘에 맞는 이들과
이런 폐사지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을 찾아 답사여행하면 참 좋으리라...
▲ 순결바위 !
순결바위래서 매우 궁금했는데 쪼개진 바위네.
그런데 이 큰 바위가 무슨 원인으로 이렇게 요철모양으로 갈라진 걸까?
화강암이라 퇴적암처럼 석회성분이 빗물에 의해 풍화된 것도 아닐 테고...
그 사이에 나무가 자란 것도 아닌데...
아~ 아주 오래 전에 미세한 바위틈을 따라 소나무가 자라다가 바위가 갈라지니
뿌리가 노출되어 고사했을 수도 있겠구나...
아주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뚫고, 가느다란 풀뿌리가 암석을 가를 수 있지.
유장한 세월과 부단한 생명력 앞에 검불 같은 인생이구나.
모산재를 지나 하산하면서 좌우전후로 보이는 바위들이 정말 기기묘묘 멋지다.
하산 방향 오른쪽으로는 화강암 산등성이에 덩그러니 올라앉은 돛대바위가 보이고,
거기 매달린 수직에 가까운 철계단이 보는 것만으로도 진땀이 나게 한다.
실제로 오르내려보면 그다지 무섭지 않다고 하지만,
지난해 겨울에 갔었던 운악산이 생각나서 소름이 돋고 진저리가 난다.
기왕 설치할 거라면 발 디딤이라도 편하게 철판으로 할 것이지,
미끄러운 철봉으로 계단을 만들다니...
오히려 계단이 없으면 포기하든가 우회를 할 텐데... 쯧~
▲ 영암사지삼층석탑(보물 제480호)
▲ 통일신라 시대의 씽사자 석등(보물 430호)
▲ 통일신라 시대 추정 영암사지 귀부(보물 489호)
▲ 영암사지
영암사터는 황매산(黃梅山) 남쪽 기슭에 있는
신라시대로 추정되는의 절터이다
재일씨 말에 따르면 합천군 가회면 오도리 이팝나무가 활짝 펴야
황매평전 철쭉꽃도 만개한단다.
정말 이팝나무 꽃이 안 폈네.
학교 교육이나 책을 통해 깨우친 지식이 실제 생활에서 터득한 지혜를
절대로 넘어설 수가 없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사람과 세월을 오래 산 사람은 어느 곳에서든 존중을 받나보다.
만개한 예쁜 꽃 보러 간 산행에서 한 개도 안 핀 꽃 봉우리만 보고 왔지만
잘 생긴 돌 봉우리들과 영암사지에서 만난 보물들로 더 없이 행복한 날이었다.
괜찮았다. 다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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