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_DAUM->
주말에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 기상청 예보는 있었지만 최근 비 온다는 날에도 산행하면서 비 맞은 일이 거의 없었기에 걱정은 안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배낭 맨 아래에 우비를 챙긴다.
산에 오르는 일이 점점 힘에 부쳐 배낭 무게라도 줄여 보려고 몇 번 김밥을 가져갔었는데 날도 추우니 이번엔 메뉴를 바꿔볼까? 일단은 가벼운 걸로... 궁리 끝에 동네 제과점에 들러 샌드위치를 사서 과일, 두유, 물, 스포츠 음료 등과 냉장고 한 쪽에 정리해 둔다. 이렇게 해 놓지 않으면 한 가지라도 꼭 빼먹는 게 다반사니...
거실 한 가운데 배낭, 바지, 티셔츠, 점퍼, 양말, 여벌 옷, 장갑, 모자, 물티슈, 휴지, 비상약, 깔개 등등... 쫘~악 깔아놓고 준비를 한다. 누가 보면 해외여행이라도 가는 사람 짐 챙기는 줄 알겠다. 요렇게 했는데도 빼먹은 것이 있다. 아주 중요한 밥상보!
나야 이렇게 내게 필요한 것만 잘 챙겨 시간에 맞게 버스 타러 가면 그뿐이지만 회장, 부회장은 새벽 출발부터 도착할 때까지 산행하는 전체 회원들의 하루를 다 챙겨야 하니 얼마나 신겅이 쓰일까... 어디 하루뿐인가? 요즈음처럼 산행 참가 인원이 적을 때는 마음고생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한 자리라도 채워 보려고 이리저리 전화를 돌려보지만 별 소득이 없네...
이럴 때는 꼭 다들 산에 일부러 안 가려고 짠 것 같은 서운한 맘까지 든다. 전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에 나오는 한 구절이 생각나네. <세상이라는 건 바라는 대로 풀리지 않고, 오히려 어떤 것을 바라지 않는 지를 훤히 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바라는 대로 풀고 말 것이다!~~~아자!~~~ 금방 울 것 같은 찡그린 하늘이지만 구름 위에 태양은 지금도 웃고 있다! 우리들은 추월산 앞에 여봐라!~ 떼거지 사진을 박는다.
몇 발짝 포장된 길을 오르니 이내 낙엽이 푹신한 산길이 이어진다. 오늘 산행코스는 보리암으로 올라 추월산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것인데 갈림길에서 일일산대장 태산님이 보리암 가는 길을 두고 옆길을 택한다. 산이라면 뭐든지 다 알 것 같은 인자무적도 암 말을 안 하니 뭣도 모르는 내가 뭐락하기도 그렇고..... ㅎ 그래도 속으로 말했다. “왜 일루 간댜?”
그런데 가려고 했던 그 길에서 벗어난 이 옆 산길이 정말 아름다웠다. 봄에서 여름 동안 나무들의 생명력으로 꽉 채워졌던 숲은 가을이 깊어가며 나날이 헐렁해져 쓸쓸해 보일 테지만 오늘은 그 빈 공간을 산안개가 가득 채우고 있다. 내 유전자 속에나 희미하게 흔적으로 남아있을 태고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다 안개 때문이리라...
산안개와 더불어 늦가을 숲속의 공허를 채워주는 또 하나 낙엽들. 제 한생 잘 살아내고 그 무엇에도 부담 주지 않는 가벼움으로 내려앉아 함부로 아무러이 되지 않는 무거움으로 땅속에 스며들고 마는 낙엽들. 나도 낙엽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배워야 하는데...
도통 안개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산을 오르는 이유 중에는 멀리 넓은 세상을 보려함도 있는데... 누군가 말 했듯이 세상에는 모르는 채로 덮어두는 게 좋은 일도 있다던데 진상을 알면 상처가 된다나? 또한 진상을 알게 되면 거기에 대한 책임도 떠맡을 수밖에 없다나? 그래. 오늘은 모두 안개 때문이라고 하자...
쬐끔 올라왔을 뿐인데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후들. 요럴 때 팬더표 생명수가 최고다. 오늘도 바가지 헹구는 일은 내가 하네. 흐흐흐. 장끼님이 왔으면 그이가 하는 일인데... 군것질을 줄였는지 팬더님 배 둘레가 헐렁해 보인다. 누가 이이를 40대 후반 아저씨로 볼 겨? 공부하느라 여기저기 붙은 군살 아직 덜 빠진 대학1년생? 뭐. 요런저런 음료 얻어 마시고 립서비스 하는 건 아녀유!~~~절대로!
추월산 정상과 보리암 정상으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회장님이 선두를 부르니 보리암 정상까지 갔다가 되돌아 추월산 쪽으로 오고 있단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월산 쪽으로 진행하는 선두네. 요렇게 산행 중에 선두가 한 코스 더 갔다 오는 산행이 난 디게 좋다. 왜 좋으냐고 물으면? 묻는 니는 바보여!. 켁!
추월산 정상에서 두 군데로 나누어 오순도순 밥상을 폈다. 몸뚱어리 하나도 힘에 부치는 데 다들 푸짐하게 꺼내 놓는다. 먹을 때 섬초롱이 옆에 있으면 늘 설렌다. 호호호. 산 위에서 떡만두라면을 얻어 먹을 수 있다니... 큰 생수병을 짊어지고 온 봉달이도 참 대단하고...
점심 식사 후 다들 추운지 배낭에서 두꺼운 옷들을 꺼내 입는다. 다 먹은 밥상을 치우던 섬초롱이 “까투리 언니!~보리암 왜 안 보여 주는겨?” 에구... 이 화상. 여태 보리암으로 안 가고 옆길로 왔다고 떠들었는데 뭐 듣고 있다가 뒷북인지... 흐흐흐...
그런데 뒷북 제대로 쳤다!~~~
아까 그 분기점으로 뒤돌아가 보리암으로 하산을 했다. 부처님의 가피인지 섬초롱의 뒷북 때문인지 안개가 걷히면서 아름다운 담양호와 호수 주변에 아직도 남아있는 가을 단풍 바위산에 사뿐히 앉은 보리암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이미 산 아래도 단풍은 다 져서 기대도 안 했는데 투명 물감으로 은은한 수채화를 그려놓은 듯 호수를 둘러싼 산자락의 단풍이 고상하다.
수직으로 솟은 바위봉우리 8부쯤에 앉은 보리암은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지리산 천왕봉에서 나무로 깎아 날려 보낸 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내려앉은 곳에 창건했다는 절이며(백양사, 송광사)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 장군의 부인 흥양 이씨가 왜적에 쫒겨 이곳 절벽에서 몸을 던져 순절한 유서 깊은 곳이란다. 직접 가서 보면 지은 지 오래되지 않아 고풍스런 멋은 없지만 멀리서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보면 주변 풍광과 어울려 환상이다.
특히 바위산 봉우리가 보름달에 닿는 날 밤이면 담양호와 추월산 일대는 가히 선경(仙境)이리라. 전망대 난간에 기대어 잠시 꿈을 꾸어본다.
지금은 산 위가 더 궁금해서 산 위를 지향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산 위를 향한 마음이 몸에 굴복할 때가 되면 산의 모습이 하늘과 땅과 어울려 가장 아름다울 때를 찾아 날 위해 내려도 와 줄 산의 마음을 느끼는 유람을 하고 싶은데...
에구구~~~꿈 깬다!~~~ 이 많고 많은 계단을 내려가야 하다니... 그나마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천만다행이지만.
주차장에서 올려다보는 수직으로 솟은 바위산의 실루엣이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엘 캐피탄을 연상시킨다. 뭐 내 느낌이니까...
안개로 인해 산에 오르는 동안에는 조망이 없어 갑갑했지만 산행하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우리는 오늘도 바라는 대로 이루었다!~~~ 산내음 얼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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