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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된 시인들

김수영의 낙타과음 전문

by 장끼와 까투리 2010.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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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과음(駱駝過飮) 김수영

 

Y여, 내가 어째서 그렇게 과음을 하였는지 모르겠다.

예수교 신자도 아닌 내가 무슨 독실한 신앙심에서 성탄제를 축하하기 위하여

술을 마신 것도 아니겠고, 단순한 고독과 울분에서 마신 것도 아니다.

어쨌든 근 두 달 동안이나 술을 마시지 않다가 별안간에 마신 과음이

나의 마음과 몸을 완전히 허탈한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나는 지금 낙타산이,

멀리 겨울의 햇빛을 받고 알을 낳는 암탉 모양으로 유순하게 앉아있는 것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이는 다방의 창 앞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Y여, 어저께는 자네 집 아틀리에에서 춤을 추고 미친 지랄을 하고 나서 어떻게

걸어 나왔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어떤 자동차 운전수하고 싸움을 한 모양이다.

눈자위와 이마와 손에 상처가 나고 의복이 말이 아니다.

오늘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가 누워있는 곳은 나의 집이 아니라 동대문 안에 있는

고모의 집이었고 목도리도 모자도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기억이 전혀 없다.

머리가 무거웁고 오장이 뒤집힐 듯 메스꺼워서 오정이 지나고 한참 후에까지 누워있었다.

 

옷이 이렇게 전부 흙투성이가 되었으니

중앙지대의 번화한 다방에는 나갈 용기가 아니 나고 나가기도 싫고

몸도 피곤하여 여기 이 외떨어진 다방에나 잠시 앉았다가 집으로 들어갈 작정이다.

 

인제는 궁둥이를 붙이고 있는 데가 내 공장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를 가서 어떻게 앉아있어도 쓸쓸하지가 않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몹시 쓸쓸하다.

 

B양이 생각이 난다. B양이 어저께 무슨 까닭으로 참석하지 않았는지?

그러고 보니 나는 어제 억병이 된 취중에도 B양을 보러 갔던가?

그렇다면 어떻게*1) 이 외떨어진 다방에 고독하게 앉아서 넋 없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B양에 대한 그리움이 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2)

B양의 눈맵시, 그리고 그 유닠하게 생긴 입에 칠한 루즈가

주마등과 같이 나의 가슴을 스쳐간다.

 

Y여, 그리고 자네의 애인인 림 양이 춤을 추다 말고 나와서 외투와 핸드백을 집어 들고

B를 부르러 간 것도 아주 먼 옛날에 일어난 일같이 술이 완전히 깨지 않은 이 머리 안에서 마치 안개 속에 숨은 불빛같이

애절하게 꺼졌다가는 사라진다.

 

나는 지금 무엇에 홀린 사람모양으로 이 목적 없는 글을 쓰고 있다.

이 무서운 고독의 절정 위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겠나?

자네의 모습이며 림 양의 모습이며 B양의 모습이 연황색 혹은 연옥색 대리석으로

조각을 하여놓은 것처럼 신선하고 아름답고 부드러워 보인다.

 

이 아름다움으로 사람에게 느끼는 아름다운 냄새를

나는 어떻게 처리하여야 좋을지 모르겠다.

 

사람에게 환멸과 절망을 느낄수록

사람이 더 그리워지고 끊임없는 열렬한 애정이 솟아오르기만 하는 것이 이상하다.

 

갈 데가 없으니 다방에라도 가서,

여기가 세상을 내어다보는 유일한 나의 창이거니 생각하고 앉아있는 것인데,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은 언제나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 있는 난로 가장자리는 아니고,

몸이 좀 춥더라도 구석 쪽 외떨어진 자리를 오히려 택하여 앉기를 즐겨하는 나다.

 

이렇게 앉아서 고드름이 얼어붙은 창을 어린아이같이 내다보는 것이다.

창을 내다보며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무기체와 같이 그냥 앉아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창밖에는 희고 노란 빛을 띤 낙타산이 바라보인다.*3)

 

지금 내 몸은 전부가 공상의 덩어리가 되어있다.

내가 나의 작은 머리를 작용시켜서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전신이 그대로 공상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말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

사실인즉 미안하지만 자네는 이 마음을 알아줄 것이다.

목적이 없는 글이니 목적이 없는 정서를 써보아도 좋을 것이라고 나는 스스로 자인한다.

 

어느 거리, 어느 다방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계집아이들.

붉은 양단 저고리에 비로오드 검정치마를 아껴가며 입고 있는 계집아이들.

내가 이 아이들을 볼 때는 무심하고 범연하게 보고 있지만

이 아이들이 생각에 잠겨있는 지금의 나를 볼 때는 여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걸세.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공연히 엄숙한 마음이 드네.

그리고 그들이 스치고 가는 치맛바람에서

나는 온 인간의 비애를 느끼고 가슴이 뜨거워지네.

 

술이 깨어날 때 기진맥진한 이 경지가 나는 세상에서 둘도 없이 좋으이.

이건은 내가 <안다는> 것보다도 <느끼는> 것에 굶주린 탓이라고 믿네.

즉 생활에 굶주린 탓이고 애정에 기갈을 느끼고 있는 탓이야.

그러나 나는 이 고독의 귀결을 자네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려네.

거기에는 너무 참혹한 귀결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아!

내 자신에게 고백하기도 무서워. 이를테면 죽음이 아니면 못된 약의 중독 따위일 것이니까.

자네는 나를 '잊어버린 주말'에 나오는 레이 미란드 같다고 놀리지만 정말 자네 말대로 되어가는 것 같애.

 

운명이란 우스운 것이야.

나도 모르게 내가 빠지는 것이고, 또 내가 빠져있는 것이고 한 것이 운명이야.

실로 운명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냐. 그것은 말할 수 없이 가벼운 것이고 연약한 것이야.

 

Y여, 자네의 집에서 열린 간밤의 성탄제 잔치는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단아하고 구수한 것이었어.

나는 이대로 죽어도 원이 없을 것 같으이. 이것은 결코 단순한 비관이 아닐세.

낙타산에 붙어있던 햇빛이 없어지고 하늘은 금시 눈이라도 내릴 것같이 무거우이.

 

Y여, 나의 가슴에도 언제 눈이 오나?

새해에는 나의 가슴에도 눈이 올까?

서러운 눈이 올까?

 

머릿속은 방망이로 얻어맞는 것같이 지끈지끈 아프고

늑골 옆에서는 철철거리며 개울물 내려가는 소리가 나네.

이렇게 고통스러운 순간이 다닥칠 때 나라는 동물은 비로소 생명을 느낄 수 있고

설움의 물결이 이 동물의 가슴을 휘감아 돌 때 암흑에 가까운 낙타산의 원경이

황금빛을 띠고 번쩍거리네.

 

나는 확실히 미치지 않은 미친 사람일세 그려.

아름다움으로 병든 미친 사람일세.

 

* 1) 뼈가 말신말신하도록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아니 된 것도 B양이 오지 않은 외로움에

못 이겨 무의식중에 저지른 일종의 발악이었던가.

 

* 2) 아무튼 나는 내 자신이 우습다. 한없이 우습기만 하다.

 

* 3) 낙타산은 나와는 인연이 두터운 곳이다. 낙타산 밑에서 사귄 소녀가 있었다.

나는 그 소녀를 따라서 지금으로부터 약 십오 년 전에 동경으로 갔었다.

내가 동경으로 가서 얼마 아니 되어 그 여자는 서울로 다시 돌아왔고,

내가 오랜 방랑을 끝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는 미국으로 가벼렸다.

지금 그 여자는 미국 태평양 연안의 어느 대도시에서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며,

영원히 이곳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가 그의 오빠에게로 왔다 한다.

나와 그 여자의 오빠와는 죽마지우이다. <1953. 12>

 

<김수영 전집 2 산문>1981.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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