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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海에서 건진 보석들

[스크랩] [영화]왜 사람들은 길에서 우는가?

by 장끼와 까투리 2009. 8. 24.

 

 

 

 

왜 사람들은 길에서 우는가?

 

 

 

 


 이탈리아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의 1954년 작 <길>(La Strada)을 처음 본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명작을 본다는 호기심으로 선뜻 예술 전용 극장 문을 들어선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흑백 필름의 신파조 스토리는 영상 세대의 감수성을 크게 자극하지는 못했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았더라면 영화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섰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도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적인 의문 하나가 뇌리를 영 떠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지극히 감상적인 옛 영화가 내 감성 대신 이성을 자극한 셈이었다. ‘왜 부평초처럼 떠도는 유랑극단의 비극에 길이라는 제목이 붙었을까?’

 

 

  
물론 감독은 영화 곳곳에서 해답을 암시한다. 쇠사슬을 끊는 묘기를 선보이는 짐승 같은 곡예사 잠파노(안소니 퀸)와 그의 조수로 천사 같지만 어딘가 모자라는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 두 사람이 주축이 된 유랑극단은 끊임없이 길 위를 떠돈다. 잠파노가 데리고 있었지만 그의 살인 현장을 목격하고 정신 이상이 돼 버린 젤소미나. 극단의 흥행에 도움이 안 된다며 그녀를 버리고 도망쳤던 잠파노는, 그녀가 병들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이 극적인 순간 이후 잠파노가 다시 길을 떠난다는 영화의 말미 역시 비슷한 암시다.

  
펠리니 감독은 실제로 정규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유랑 극단 생활을 했고, 감독이 되고서도 유랑 극단 생활을 동경해 마지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길 위의 삶을 영상으로 옮기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가졌던 의문에 대해, 가장 먼저 구한 답은 그랬다.

  
이 답이 지나치게 단편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은, 우연찮게도 우리 시 한 편을 읽으면서였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전혀) 갈 길은 없소.’(김소월, <길>) 공교롭게도 이 시의 제목 역시 영화와 같았다. 저자인 김소월이 펠리니 감독처럼 방랑벽을 타고 태어났다는 점 또한 비슷했다. 이 시에서 길은 그 차제가 하나의 상징으로, 유랑민으로서 삶의 행로를 뜻한다. 더 나아가서 길이 곧 삶인 셈이다. 펠리니 감독은 단순히 길 위의 삶을 그리려 했던 것이 아니라 길이 곧 삶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후 <길>이라는 영화를 몇 차례 더 보면서 이 점은 더욱 더 뚜렷해졌다.

  
그렇다면 펠리니의 영화나 소월의 시에서 보듯, 길은 왜 서러운가? 왜 길이라는 말에서 비극과 불운을 떠올리는 데서는 동서양의 차이가 없을까? 단순히 현실 세계가 힘들고 고단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현실은 비극과 희극의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 불운과 행운의 요소 또한 다 내포하고 있다. 길이 곧 삶인 한, 길이 반드시 서럽기만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보다 길은 마치 인생처럼, 본질적으로 비극과 불운의 요소를 갖고 있어서일 것이다. 사람들은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늘 피안(彼岸)의 세계를 꿈꾼다. 현실과 피안이 맞닿는 지점이 어디에도 없는 이상 사람들은 길 위의 유랑 극단일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나 역려과객(逆旅過客)일 수밖에는 없다.

  
해석의 여지가 많기는 하지만, 윤동주가 쓴 동명(同名)의 시가 이런 길, 즉 삶의 본질적 한계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이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 시인에게 그렇듯, 사람들은 늘 잃은 것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힘든 법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생이 힘든 이유는, 그것이 곧 선택할 운명이기 때문이다. 늘 현실적인 선택을 하면서 이상적인 대안을 꿈꾸고, 땅을 쳐다보면서 하늘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삶은 한 가지를 선택하면서 다른 선택을 포기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이 점은 서양의 명시,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서 묘사한 그대로다. ‘노란 숲속에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두 길을 다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나그네라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보았습니다...(중략)...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것으로 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물론 이런 생각에까지 미치게 된 것은 <길>이라는 영화를 몇 차례 더 본 후였다. 젤소미나를 학대하고 버렸던 잠파노는 왜 그녀의 죽음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을까? 그리고 다시 길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을까? 유랑 극단원의 운명을 타고난 그 역시 삶의 비극과 불운에 좌절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이 포기했던 다른 선택을 들여다봤던 것은 아닐까? 이 의문에 아직 확신을 가지고 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길이 곧 삶이고, 모든 사람들은 길 위에서 사람들은 운다는 사실을 점차 배우게 될 것만 같다. <길>이라는 영화를 통해 인생을 배웠듯이.

 


출처 : Lifestyle Report
글쓴이 : 이여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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