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웹海에서 건진 보석들

두고 보자... 마광수

by 장끼와 까투리 2010. 2. 20.

 

두고 보자 ...................................... 마광수

 

언젠가 나는 대형 강의실에서의 강의시간에 수강생들에게

<두고 보자>라는 말을 세 번 복창시킨 적이 있다.

<복창>이라는 것이 군대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식이라 좀 떨떠름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한 학기에 두서너 번씩 학생들한테 복창을 시키곤 한다.

일종의 자기암시법이라면 자기암시법이고 세뇌라면 세뇌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에서보다는 수강생이 많다 보니 학생들의 산만해진 주의력을

환기시킬 필요도 있고, 일방적인 주입식 강의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

가끔 그런 방식을 써보는 것이다.

 

때때로 내가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또 가르쳐 주기도 하는데,

연세대 백양로 주변의 단풍이 한창 고왔을 때는 프랑스 샹송인

<고엽(枯葉)>을 영어 가사로 같이 불러 보기도 했다.

특히 두 시간 속강으로 강의를 하게 될 때,

오직 나 혼자의 입심 하나만으로 5백 명 이상의 수강생들을

골고루 사로잡기는 정말 어렵다. 대단위 수업을 하게 될 때마다

나는 내가 마치 일인극(一人劇)의 배우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왕이면 될수 있는 대로 지루한 느낌을 갖지 않게 하려고

가끔씩 <복창>의 수법을 써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단골로 복창시킨 말은

<역설적 의도>라든가 <지난행이(知難行易)> 같은 것들이었는데,

<두고 보자>라는 좀 무시무시한 협박조의 말을 복창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5백 명 젊은이들의 입술이 한꺼번에 벌어지면서,

<두고 보자, 두고 보자, 두고 보자 !>가 살벌한 기운을 내뿜으며

소강당 안에 우렁차게 메아리쳤다.

 

<두고 보자>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흔히 복수를 다짐할 때 쓰이곤 하는 말이다.

일본사람들은 대동아전쟁에 패하여 한국에서 쫓겨 갈 때 <두고 보자>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두고 보자>를 그런 악담(惡談)의 뜻으로 학생들한테 외치게 한 건 아니다.

나는 그 말을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고 좀 더 천천히 시간을 두고 기다려 보자>의

뜻으로 썼던 것이다.

 

나는 특히 졸업반 학생들이 취직문제로 너무 초조해 하는 것 같아,

소위 <성공>이라는 것에 너무 서둘러 도달하려 하지 말고 자신의 운명의 변화를

지긋이 지켜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자는 뜻으로 그 말을 강조한 것이었다.

요즘 대학생들이 혼기에만 연연하여 쉽사리 <임자>를 정해 버리는

경향에 대해서도 나는 역시 <두고 보자>를 적용시켜 언급해 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나 성급하다.

아니, 성급 정도가 아니라 화급(火急)이다.

밥도 급하게 먹고 공사 같은 것도 우선 빨리 끝내고 보는 것을 장땡으로 여긴다.

 

그래서 세계에서 제일 빨리 완공했다는 경부고속도로는 온통 땜질 자국투성이이고,

헌법도 정말 변덕스러우리만치 자주 바뀌었다.

어떤 한국인이 미국에 가서 중국요리 집에 들러 음식을 주문한 뒤

웨이터에게 <빨리 빨리 가져와요 !> 하며 독촉하자,

그 중국인 웨이터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중국집을 할 때 손님들이 하도 <빨리 빨리 !>라는 말을 많이 하는 바람에

그게 듣기 싫어 미국으로 왔는데, 여기에서까지 그 말을 듣게 되니 정말 짜증난다.

당신 같은 사람한테는 음식을 팔기 싫으니 어서 빨리빨리 나가 달라>고 말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4.19 이후 허정 과도 정부를 거쳐 장면 정권이 들어선 지

채 일년도 못 되어 5.16이 일어났다. 민주당 정권 내부의 신, 구파 대립이라든가,

장면씨의 우유부단한 정책으로 인한 과오도 많았지만,

그래도 5.16은 너무나 화급하게 이루어졌다.

 

박정권의 경제적 업적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5.16 군사 쿠데타의 불법성(不法性)을

덮어 주진 못한다. 왜 박정희씨는 장면 정부를 좀 더 <두고 봐> 주지 못하고

그토록 서둘러야만 했단 말인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같은 것도 장면 정부의 마스터플랜 안에

이미 다 들어가 있던 것이었다. 5.16 덕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나라 경제가

계속 침체 상태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초등학교 때의 일이지만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다.

라디오를 통해 장면 국무총리와 대학생 대표들 간에 벌어진 토론회를 들었던 기억이다.

그때 대학생들은 장면 총리를 계속 추궁을 해대고 있었다.

<지금까지 당신이 해놓은 게 대채 뭐요>라는 투의 내용이었던 것 같다.

정권이 바뀐 지 기껏 서너 달밖에 안 됐을 때의 일이다.

지금의 내가 보기에 장면 정부시절은 민주적 절차에 있어서만은

단군이래 최고의 신사도를 지켰던 기간이었다.

그런데도 군인들은, 또 학생들은 좀 더 두고 보아 주지 못하고

정부의 무능만을 탓했던 것이다.

 

연애한 지 서너 달 만에 결혼 말이 오가고,

맞선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리는 세상이다.

대학입시에 합격하려고 그토록 애를 써가며 입시준비를 했던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온 지 몇 달도 못 되어 <강의가 형편없다>

<과(科) 학생들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가며 강의를 빼먹기 일쑤고,

심지어는 휴학을 하겠다고 덤빈다.

이 세상을 더 찬찬히 살아 보지도 않고 교회로 달려가 현세(現世)를 저주하면서

내세(來世)에만 매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을 끝까지 읽지도 않고 서문만 보고 나서 벌써 내용을 다 짐작하고도 남는다고

욕부터 해댄다. 왜들 이렇게 설쳐대는 것일까?

 

제발 두고 보자, 두고 보자, 두고 보자 !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 매어 쓸 수는 없다.

 

댓글